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의 천주교 박해 (문단 편집) ==== [[파리외방전교회]]는 [[제국주의]]의 첨병? ==== [[선교]]가 서양 본국의 정치적 패권에 기여할 수는 있지만, 이건 선교이든 장사이든 인적 교류가 발생하면서 따라붙게 되는 부작용이지, 선교 그 자체가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건 아니다. '''[[프랑스인]] [[선교사]]가 원주민에게 죽으면 [[인계철선|프랑스 정부의 개입 명분이 될 순 있지만]], 프랑스인 선교사의 목적은 원주민에게 죽는 것이 아니다.''' [[순교자]]가 공경을 받는 것은 맞고, 많은 선교사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지만, 순교는 "어쩔 수 없을 때 당하는 것"이고 제1 목표는 당연히 선교사가 살아남아서 현지에 신자들을 늘리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오히려 파리외방전교회는 선교 단체 중 제국주의 국가 입장에서 가장 도움이 안 되는 단체였다. 17세기 [[예수회]]처럼 국왕의 보호권이랑 얽힌 것도 아니고, 1822년 후로는 자금도 전액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한(즉, [[프랑스 정부]]에 금전적으로 묶이지 않은) 파리외방전교회는, 회칙에서부터 최고 목표를 '방인(邦人, 원주민) [[사제]] 양성'으로 잡았기에, 프랑스 제국주의 입장에선 '원주민 교회의 독립성을 의도적으로 강화하는', 참으로 도움 안 되는 단체였다. 무엇보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 배경부터가, 기존 선교 방식이 제국주의와 얽히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국주의와 얽히지 않으려는 의도는 비록 결실을 본 것은 아니지만,[* 파리외방전교회와 프랑스 속권 양쪽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프랑스 속권에 종속되길 거부했으나, 프랑스 속권이 해외에서 휘두르는 무력에는 의지하였다. 한편 프랑스 속권은 파리외방전교회를 백안시했고, 실상 파리외방전교회가 프랑스 본토에서 받은 대우는 개신교 국가의 가톨릭 선교 단체와 크게 다를 바도 없었지만, 선교사들이 개척한 전교 지역을 프랑스 속권은 노골적으로 떡고물로 취급했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이 문제를 의식했으며, 원주민 사제의 빠른 양성이라는 성과로 나타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포르투갈 왕의 보호권이 지배하던 17세기 중엽 아시아 각국의 교회 상황은 처참했다.[* 발췌자 주석: 다만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의 전교가 이베리아인들이나 예수회보다 더 성공적이었던 것은 또 아니다. 선교사 본인의 문제{{{-2 (19세기 초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초래한 극히 감정적인 종교성에 기인한 반주지주의(反主知主義), 이로 인한 선교사들의 지적 능력 악화, 속권의 간섭은 싫지만 필요하면 속권의 무력에 호소하려는 이중적 태도)}}}와 외부의 문제{{{-2 (혁명 이후의 전교회의 재정적 열악함, 신학교 폐쇄, 본국에선 전교회를 백안시하지만 전교 지역이 개척되면 이를 떡고물로 보는 프랑스 속권의 이중적 태도)}}}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결과적으로는 프랑스냐 이베리아냐 영미냐, 혹은 파리외방전교회냐 예수회냐 개신교냐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의 남아시아·동북아·동남아 선교는 필리핀의 가톨릭화와 한국의 부분적 개신교화 정도를 제외하면 큰 교세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일본의 교회는 한 때 대단히 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통킹에서 일하는 유일한 선교사들이었던 예수 회원들은 1663년에 그곳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고 쫓겨 나왔다가 6년 후 다시 들어가려다 필요없이 박해만 조장한 셈이 되고 말았다. 1665년에 코친차이나{{{-2 (현 베트남)}}}에서는 선교 활동이 시작되지도 못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포르투갈 사람 밖에 없었다. 중국에서는 1665년에서 1671년 사이에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광둥{{{-2 (廣東)}}}에 억류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된 주 원인 중의 하나는 당시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함에 있어서 종교외적 특권들을 사용하여, 말하자면 포르투갈 왕권을 등에 업고 유력자{{{-2 (有力者)}}}로 행세한다든지, 그 일부가 심지어 상행위{{{-2 (商行爲)}}}에 가담하는 외도{{{-2 (外道)}}}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정치 권력에 유착된 그리스도교는 심지어 "포르투갈인들의 법"이라고 불리웠고, 해로{{{-2 (海路)}}}를 통한 외국 무역의 역사가 거의 없던 동남아 각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예수회원들이 운항하던 상선들은 현지인들에게 심한 거부감을 주었다. 고아와 마카오에서 예수 회원들이 경영하던 상점들은 인도에서부터 중국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유명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선교사들은 사람들을 영세 입교시키기는 했어도 본방인[* 발췌자 주석: 원주민] 사제들을 양성하고 교구를 설립한다는 등의 배려를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 선교권을 교황청에서 다시 찾아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이병호 >1653년 1월 27에는 아시아에서 다년간 선교사로 일해 온 62세의 예수회 신부 알렉상드르 드 로드{{{-2 (Alexandre de Rhodes)}}}[* 발췌자 주석: 일본 선교를 목적으로 1618년에 로마를 떠났으나 일본의 쇄국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대신 코친차이나와 마카오에서 선교를 했다.]가 파리에 도착했다. ... 그때 로드 신부는 절실히 느낀바가 있었다. 자기와 같은 서양 사람이 아닌 현지의 사제들이 포교활동을 한다면 당국의 눈을 피해 최소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시절이 바뀌기를 기다리기가 얼마나 수월할 것인가? '''그런데 그곳[* 발췌자 주석: 코친차이나와 마카오]에서 선교가 시작된지 30년이 지난 그때까지 단 한 명의 방인사제[* 발췌자 주석: 원주민 사제]도 양성하지 않고 있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선례가 그 지역에서도 다시 한번 재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 박해시대에 만일 일본인 성직자들이 충분히 있어서 비교적 쉽게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겨가며 성무를 집행할 수가 있었다면, 한 때 인간적 유약성으로 인해 배교했던 사람도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등, 교회가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소멸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사정이 비슷해서 현지인 가운데 적당한 사람들을 선발 양성하여 사제품을 줄 주교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유럽에 돌아가 교황께는 주교들을 청하고, 신자들에게는 선교 자금을 청하며, 자기 수도회 총장에게는 필요한 선교사들을 청하기로 하고 1649년 로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듬해에 통킹과 코친차이나의 교회 상황을 보고하면서 그곳에 30만의 신자가 있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사목을 위해 최소 300명의 사제가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그렇게 '''많은 외국 선교사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면 박해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빚고 말 것이라는 점 등을 역설하였다.''' >...로드 신부에 의해 추천을 받아 포교 성성으로부터 파견될 주교들은 바로 이 교회감목이라는 자격으로 가게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발탁된 사람들은 프랑수아 팔뤼{{{-2 (François Pallu)}}}, 피에르 랑베르{{{-2 (Pierre Lambert)}}}, 이냐스 코톨랑디{{{-2 (Ignace Cotolendi)}}}였다. 이 중 세 번째 인물은 중국 남경의 교황대리감목이면서 북경과 조선도 그의 책임하에 두기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도중에 타계하고 말았다. 그러나 1658년 나머지 두 사람이 주교로 서품되고 포교 성성으로부터 파견되어 아시아로 떠남으로써 파리외방전교회는 이들을 창립자들로 하여 1659년에 사실상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이병호 당시 포교성성이 프랑수아 팔뤼{{{-2 (François Pallu)}}}와 피에르 랑베르{{{-2 (Pierre Lambert)}}}를 선교지로 보내면서 내린 훈령과 파리외방전교회 회칙을 보면, 기존 선교 방식에 대한 교계 내부의 반성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포교성성이 이들을 선교지로 보내면서 내린 훈령을 유심히 보아 둘 필요가 있다. 거기에 이 회의 기본 정신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사제직에 적합한 자질을 가진 젊은이들을 가능한한 많이 훈련시키고 양성하여 성품을 받게 한다고 하는 이 목적을 한 순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중국 사람들에게 프랑스나 스페인 또는 이탈리아나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들을 그대로 이식한다면 그보다 더한 비합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우리 쪽의 나라들을 가져다 주지 말고 신앙을 가져다 주십시오. 이 신앙은 어떤 민족의 것이건 간에 그 자체 타기{{{-2 (唾棄)}}}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일체의 관행이나 의식을 배척하거나 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보존하고 보호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전통과 자기 나라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 타고난 본성에 속한 성향입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신의 나라 관습을 그 자리에 대치시킨다면 그것은 무슨 꼴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 백성들의 관행과 유럽의 관행을 비교하지 말고, 오히려 여러분 자신을 그들의 관행에 맞추어 그 쪽으로 익숙하게 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그러나 소위 중국 전례 논쟁으로 포교성성의 이런 기본 방침이 얼마나 정면으로 자가당착에 빠졌던가를 우리는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여기에 표명된 원칙이 실제에 있어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못한 사례는 상당히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당시까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보호권을 앞세운 선교 방식이 내포하고 있던 결함을 시정하기 위한 포교성성의 기본 의도였고, 그것이 그대로 파리 외전[* 발췌자 주석: 파리외방전교회]의 근본적인 선교 방법으로도 받아들여진 정신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이병호 >1) 동인도에 [[프랑스]] [[주교]]들과 성직자들을 파견하기로 하는 계획을 구상하도록 하신 [[하느님]]의 제일 첫째 목표이며, 그 계획을 실제로 수립한 [[교황청]]의 첫째 의도는 이교인들의 회개에 있었다. 그런데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이교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뿐 아니라 그보다도 한층 더 중요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 정신이었다. 다름 아니라,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나 그 자녀들 가운데 합당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직에 올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 교회에 걸쳐서 해 주셨던 것과 같이, 각 지방에 성직자단을 구성하고 교계제도를 설립시킨다는 원칙이었다. 그 길만이 단시일 내에 완전한 [[그리스도교]]를 형성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임을 관계자들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게 되면 그런 나라의 교회는 외국으로부터의 원조 없이 자립적으로 해나갈 수가 있게 될 것이다. > >2) 그러므로 [[프랑스 파리|파리]]의 신학교로부터 배출된 모든 일꾼들은 그들이 일하게 될 지역에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에 충분한 정도의 신자들이 생기고 그들로부터 목자들을 선발해 낼 수가 있는 단계에 이르면 즉시 성직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자기네들의 가장 큰 목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하여 방인 성직자단이 형성되고, 교회가 외국 [[선교사]]들의 존재나 협력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해 나갈 만한 단계에 이르면, 성청의 허락을 받아서 그들은 흔쾌한 마음으로 모든 설비들을 방인 사제들에게 넘겨 주고 물러나 다른 곳을 찾아가 일해야 한다. > >3) 따라서 그들이 기울여야 할 노력의 우선 순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적합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직자로 양성시키는 일.''' >'''둘째, 새 신자들을 적절히 돌보는 일.''' >'''셋째,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일.''' >여기서 둘째보다는 첫째가, 셋째보다는 둘째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우선 순위를 절대로 뒤바꾸지 말 일이다. >---- >파리외방전교회 회칙 1장 中 또한 파리외방전교회가 프랑스 속권의 요청으로 조선에 선교한 것도 아니다. >외방전교회는 로마로부터 조선 포교지를 전담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외방전교회는 오랫동안 망설였으나 결국 한국진출을 수락하였다. 그러므로 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은 프랑스 국가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외방전교회 자신이 원해서 된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시기에 흔히 있었던 것처럼 국가의 팽창세력을 따라 진출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다만 로마 포교성성의 제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 >그러나 일단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하고, 이어 그들이 조선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자 프랑스는 한국의 선교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보호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종교보호정책에 기인한 것이었다. 혁명 이후 프랑스는 가톨릭에 대해 국내에서는 중립을 지키려 하면서도 해외에서는 그 보호정책을 고수하려 하였다. 이라하여 프랑스는 선교사를 살해한 것에 보복을 가하고 박해를 중지시킨다는 구실아래 수차에 걸쳐 조선해안에 군함을 파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박해를 가열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 >-〈파리 外邦傳敎會의 韓國進出의 意義 - 한국진출을 전후한 시기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 최석우 [[일제강점기]] 때 [[파리외방전교회]]가 일제의 공권력을 인정해서 적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실망을 줬을 수는 있지만,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선 말기의 조정을 공권력으로 인정한 것이 또한 파리외방전교회이다. 즉 파리외방전교회는 제국주의 국가이든 가톨릭 박해 국가이든 현지 공권력을 인정했는 것이지, 프랑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단체는 결코 아니었다. 애당초 [[독일인]]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조선에 부른 사람이,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이다. [[분류:대한민국의 가톨릭 사건사고]][[분류:가톨릭 박해]][[분류:학살 사건]][[분류:조선(19세기)]][[분류:조선의 종교]][[분류:파리외방전교회]][[분류:한불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